박우권 통영디지털역사자료연구회 회장이 ‘두룡포기사비의 원형을 찾아서’를 발간, 비문의 원문을 검증하고 관련 문헌 25편을 수록·정리해 통영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조명했다.“아, 두룡의 험한 땅이 공을 만나 국방의 요새가 되었고, 공의 공적과 덕이 또 구공을 만나서 비석에 새겨 전하게 되었으니, 단지 땅만이 사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고, 사람도 또한 사람을 기다린 것이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 두룡포기사비 중에서올해는 통제영 창설을 증언하는 ‘두룡포기사비’가 세워진 지 400년이 되는 해다. 박우권 통영디지털역사자료연구회 회장은 통영 역사의 산증인, 두룡포기사비의 원형 추적에 나섰다.그는 ‘두룡포기사비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문헌자료집을 발간, 비문의 원문을 검증하고 관련 문헌 25편을 수록·정리해 통영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조명했다. 책에는 두룡포기사비의 원문을 찾아가는 검증 논고와 두룡포기사비의 첫 건립지를 찾는 여정, 관련 문헌자료를 포함하고 있다.박 회장은 “통영이란 도시의 뿌리를 찾고 싶다면 반드시 두룡포기사비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비석은 통제영 창설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적비”라고 강조했다.그는 “통영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 비석은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와 충렬묘비명(忠烈廟碑銘)이다. 현재 세병관 경내에 있는 두룡포기사비는 통제영 창설에 대한 사적을 기록한 비로 1625년에 건립됐다.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기록한 충렬묘비명은 통영충렬사에 있으며, 1614년에 이항복이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으나 무슨 연유인지 바로 비석으로 건립되지 못하고 송시열이 비문을 추가해 1681년에 건립됐다. 따라서 두룡포기사비는 통영의 공식 1호 비석”이라고 설명했다.비문의 내용에는 이순신 장군이 두룡포 앞바다에서 한산대승첩을 이룬 일과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에 국방의 요새로 통제영지를 지정하고 설치한 일, 그의 가문과 약력, 업적 등이 기록돼 있다. 두룡포기사비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통제영의 설치에 대한 사적비이며, 그 역사는 바로 통영 탄생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우권 회장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두룡포기사비가 오랫동안 당연시돼 존재감이 희미해졌음을 지적, ‘두룡포기사비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책으로 그 정체성을 조명했다. 그는 1999년 이상필·최중호 교수에 의해 재구·복원된 원문을 여러 문헌과 비교·검증해 정확성을 확인했다. 또 비석의 받침돌이 원래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趺)가 아닌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인 방부형(方趺形)임을 밝혀냈다. 나아가 두룡포기사비의 최초 건립지를 추정하고, 관련 문헌 25편을 수록·정리했다.방부복연형으로 재현된 현재의 두룡포기사비박 회장은 “두룡포기사비는 1904년 강구안 바닷가 큰 길가에서 세병관 앞뜰로 옮겨졌는데 당시 비석 하단이 땅에 묻혀 비문의 완전한 판독이 어려웠다. 그러다 1996년 세병관 경내로 다시 옮기면서 전체 비문이 드러났고, 1999년에 이상필·최중호 두 교수에 의해 370여 년만에 완벽하게 비문의 내용이 재구·복원됐다. 하지만 제대로 주목받지 못해 이후 간행된 ‘통영시지’를 비롯 여러 기록에서도 재구·복원된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된 정보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과거에는 이 비석이 ‘귀부형(거북받침)’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원래 형태는 ‘방부복연형(네모난 받침에 연꽃무늬가 있는 형식)’이었음을 확인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던 모습과 다르게 비석이 존재했다는 거다. 이런 잘못된 정보들이 계속 전해지다 보니, 비석의 원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설명을 더했다.박우권 회장은 재구·복원된 비문의 판독 과정을 연대 순서의 문헌자료와 도표로 역순 검증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또 정보 부제로 논란이 빚어진 비의 받침돌인 비좌가 귀부가 아닌 방부복연형임을 밝히고 나아가 두룡포기사비 건립 400주년을 맞아 통영의 역사적 정체성을 고취시키고 재조명코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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