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문화유산 국민신탁’ 지역 문화재 보존 해법 될까1. 국민과 함께하는 문화유산 국민신탁2.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잇다-①3.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잇다-②4.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 지키고 이어가다 서울 이상의 집, 군포 동래정씨 동래군파 종택, 경주 윤경렬 옛집, 고흥 죽산재, 보성 구 보성여관,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 부산수정동 일본식 가옥(부산 문화공감 수정),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인천 구 조흥상회,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 남평 주조장.현재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유형별로 보전관리 되고 있는 문화유산들이다.문화유산 국민신탁은 기금으로 매입 또는 증여받은 문화유산을 보전관리, 이러한 활동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문화유산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보전할 수 있다. 특히 후세대에게 풍부한 역사적 가치를 전달하고 문화적 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민간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 문화유산의 지속가능한 관리와 보전을 이뤄내며 모두가 그 가치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호남지역 국민신탁 운동의 거점인 박다옥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건물로, 일제강점기 시절 전주 최대의 일본인 상업지역에 세워진 상업건축물이다.전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중앙동 구 박다옥 근대 상업 건물호남지역 국민신탁 운동의 거점인 박다옥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건물로, 일제강점기 시절 전주 최대의 일본인 상업지역에 세워진 상업건축물이다. 정확한 건축 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당시 전주에 들어선 최초의 대형 일식집으로 알려져 있다. 약 10년 정도 식당으로 운영되다 1940년 남선수력전기주식회사로 소유주가 변경되면서 전기회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정면 중앙 상부 박공면의 번개 모양 장식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를 전후해 입면에서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다.해방 이후 소유주가 몇 차례 변경되면서 1층은 임대상가로 사용되기 위해 외벽이 철거되고 넓은 유리창과 셔터 박스가 설치됐다. 건립 당시 마룻바닥이었던 2층과 3층 바닥은 1970년대에 콘크리트 슬래브로 변경되기도 했다.1995년 완산 새마을금고로 소유주가 변경되면서 함석지붕을 현재의 샌드위치 패널 지붕으로 교체한 건물의 좌측 후면은 신축 이후 증축된 것으로 보이며, 외벽 재료가 정면과 같은 점을 비춰볼 때 해방 이전에 증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층 좌측면의 부속 건물 또한 해방 이후 덧대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오랜 시간 지역 경제와 일상의 중심 역할을 해온 만큼, 이 건물은 지역사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된다. 현재 이곳은 지역 관계기관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적 프로젝트와 실효성 있는 콘텐츠를 발굴, 지역민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소대헌·호연재 고택의 이전 명칭은 송용억 가옥으로, 대전시 지정 민속문화유산이었지만 소대헌·호연재 인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유산이 됐다.충청의 시간을 품은 오래된 집대전에서 만나는 조선 고택 숨결소대헌·호연재 고택의 이전 명칭은 송용억 가옥으로, 대전시 지정 민속문화유산이었지만 소대헌·호연재 인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민속문화유산이 됐다.조선 중기 건축의 원형이 잘 보전돼 대전 지역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적 가치와 충청지역에서 보기 드문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를 나란히 배치했다는 희소성이 있는 고택이다.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가옥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동춘당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하가 1674년에 건립, 그의 아들 송요화가 1714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은 이 집은 동춘당 종택과 함께 한 집안의 역사와 충청 지역 명문가의 면모를 보여준다.고택은 안채, 큰 사랑채(소대헌), 작은 사랑채(오숙재), 사당으로 구성, 안채는 ‘ㄱ’자 형 평면으로 최근 대청에 유리덧문이 달려 원형이 변경됐다. 소대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넓은 대청과 온돌방, 다락 등이 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위패가 봉안돼 있다.건물 구조는 자연석 기단 위에 사다리꼴의 방형 주초와 방형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돼 있어 큰 집 격인 동춘당 종택과 함께 한 집안의 가계 계승과 충청 지역 명문가의 면모를 보여준다.조선 중기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소대헌·호연재 고택은 대전 지역의 특색을 알 수 있는 공간으로 오늘날 다양한 역사문화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고택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있다.현재 이 공간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관광지로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서당체험도 가능하다. 더불어 고택 체험 프로그램 및 인문학 강연, 다채로운 역사문화체험프로그램을 운영, 조선 시대 가족의 일상을 생생하게 구현한 미디어 그림자극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동춘당 문화관광해설사가 제공하는 역사문화 해설도 많은 이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1910년대에 일본인 제재업자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사카모토 나이지로가 건립한 일본식 주택으로, 현재는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근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울릉도의 보물도동리 일본식 가옥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1910년대에 일본인 제재업자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사카모토 나이지로가 건립한 일본식 주택으로, 현재는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울릉역사문화체험센터는 일제강점기 울릉도와 독도의 수탈역사를 알 수 있는 전시실로 활용, 특히 문화시설이 부족한 울릉도에서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건축면적 100㎡, 연면적 160㎡ 정도 규모의 2층 건물로 다다미가 깔린 2층 방에 도코노마(방의 바닥을 한 단 높게 만들어 족자나 꽃을 장식할 수 있게 한 곳)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등 건축 당시의 모습이 잘 보전돼 있다.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일제의 울릉도 침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 울릉도 도동의 중심부에 위치해 접근성이 쉬울 뿐만 아니라 근대 주택사 연구에도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2006년에는 ‘울릉도 도동리 이영관 가옥’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에 등재됐으나, 2008년 국가유산청이 매입한 뒤, ‘역사인물 국가유산’을 제외하고는 인물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등록유산 명칭 부여 기준’에 따라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이처럼 도동리 일본식 가옥은 울릉도의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운영 중인 다양한 전시 및 프로그램을 통해 일제강점기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특히 울릉역사전시관 운영으로 울릉도의 역사, 가옥 정보, 강치 관련 자료를 전시, 거주민과 관광객 모두를 위한 카페 운영 및 문화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독도와 울릉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사진전과 당시의 건축 양식을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조흥상회는 과거 인천 상업의 요충지였던 인천 배다리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 상업의 역사를 간직한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인천 상업지의 흔적 ‘인천 구 조흥상회’지역 문화예술 단체와 상권 부흥 노력조흥상회는 과거 인천 상업의 요충지였던 인천 배다리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 상업의 역사를 간직한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때 번성했던 조흥상회는 서울로 향하는 전철 개통과 인근 대형 시장의 등장으로 1970년대부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됐고, 결국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문화유산 국민신탁은 멸실, 훼손 위기에 놓인 이곳을 매입, 지역문화 활성화의 거점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인천 배다리는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일본군이 개항장 일대에 주둔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우리나라 근대 도시 형성의 시작점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경인철도의 첫 삽을 뜬 역사적 장소이자, 인천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영화초등학교와 창영초등학교가 설립되며 근대 교육이 싹튼 곳이기도 하다. 더불어 인천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으로, 교육과 항일운동, 철도와 근대 도시화의 상징적 의미를 모두 품고 있다.이곳에 자리했던 조흥상회는 당시 배다리 상권의 활기를 보여주는 근대 상업공간 중 하나였다. 정확한 건립 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 경인선 철길 아래에 있던 조흥상회는 쌀과 제사용품 등을 판매하던 가게로 인천의 중심 상권에서 한때 번성했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신도시 개발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상업 중심지에서 점차 밀려났고, 결국 문을 닫은 뒤 오랜 시간 방치됐다.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한 건물은 2012년 ‘달이네’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며 새로운 변화를 맞았다. 1층은 게스트하우스와 책방, 손님맞이방, 문화 프로그램 공간으로, 2층은 1950년대 배다리의 생활상을 재현한 생활사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조흥상회는 일본식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천 근대 상업문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소로써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지역 문화예술 단체와 함께 지역 상권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다양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남평 주조장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돼 최근까지 운영되며, 3대에 걸쳐 전통 막거리 주조법을 고스란히 계승해온 곳이다.시간을 잇는 맛, 남평 주조장의 변모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7호로 지정남평 주조장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돼 최근까지 운영되며, 3대에 걸쳐 전통 막거리 주조법을 고스란히 계승해온 곳이다. 오랜 시간 지역의 맛과 기술을 지켜왔지만 대기업의 대량생산과 유통에 따른 판로의 한계, 그리고 전통주 소비층의 감소라는 현실적인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폐업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아직 건물 내에는 주조장과 관련된 일체 기록물과 생활 유물이 온전히 남아있다. 근대 건축물로써 구조적 원형 또한 잘 보존돼 있는 남평주조장은 모두의 따스한 손길을 거쳐 가치 있는 국가유산으로 재탄생하고 있다.남평 주조장은 1930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주조장은 폐업 이전까지 남평의 명물인 막걸리를 생산했다. 특히 견실한 내부 구조체와 의장재 등을 잘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전 가치가 매우 높아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7호로 지정, 건물의 역사적 자료들을 근현대 기록문화유산으로써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전라남도 고흥에 위치한 죽산재는 1933년 죽파 서화일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목조건축물로 그의 아들 월파 서민호 선생이 완공해 부친의 제실과 자신의 서재로 사용한 공간이다.월파 서민호의 민족정신 머무른 공간고흥 죽산재 2022년 10월 신탁 증여전라남도 고흥에 위치한 죽산재는 1933년 죽파 서화일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목조건축물로 그의 아들 월파 서민호 선생이 완공해 부친의 제실과 자신의 서재로 사용한 공간이다. 아버지인 죽파 서화일은 사회사업, 복지, 교육에 헌신했으며, 아들 월파 서민호는 조선어학회사건과 항일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이다. 두 사람의 고결한 정신이 깃든 죽산재는 정교하고 화려한 건축 기법과 민화풍의 해학적인 단청이 특징이며, 불교적 요소와 근대기의 풍물이 혼합된 문화유산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화유산 국민신탁은 건물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함께 부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죽산재를 증여받아 건축적, 문화적 가치를 소중히 보전하고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