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에서 청년으로 산다는 건, ‘꿈’보다 ‘계산’이 먼저 오는 삶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통장에 머무는 시간은 짧고, 공과금과 대출이자를 지나 남는 숫자는 작다. 집을 구할 때는 전세냐 월세냐보다 “보증금은 어디서 마련하지”가 먼저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미래를 이야기하다가도 결국 “여기서 계속 버틸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지역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멋있지만, 그 멋은 대부분 통장 잔고가 감당한다.그런데 ‘퇴직금 50억’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계산의 세계가 한순간에 뒤집힌다. 청년은 한 달 급여가 오를까 말까를 걱정하고, 실수 한 번이 평가와 계약 연장에 영향을 주는 현실을 산다. 열심히 일해도, 성과를 내도, 삶이 ‘확’ 바뀌는 경험은 쉽지 않다. 그래서 청년이 그 숫자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분노라기보다 허탈함에 가깝다. “결국 어떤 사람에게만 가능한 게임이구나”라는 체념이 먼저 올라온다.물론 누군가는 말한다. 법원 판단이 어쩌고, 회사 규정이 어쩌고, 성과급이 평균임금에 포함될 수도 있다느니 하는 법리도 있다. 그 말이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청년이 묻는 질문은 애초에 다른 곳에 있다. “불법이냐 아니냐”보다 “정말 정당하냐”를 묻는다. 그 돈이 어떤 기준으로 산정됐는지, 누구의 어떤 성과로 인정된 것인지, 어떤 절차와 의결을 거쳤는지, 문제가 드러나면 환수나 이연 같은 장치는 있는지. 최소한 이런 설명이 공개돼야 ‘퇴직금’이라는 단어가 납득의 언어가 된다. 설명이 없으면, ‘퇴직금’은 의미가 아니라 방패처럼 들린다.거창 같은 지역은 이런 불신을 더 빨리 체감한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곳에서 청년은 계속 빠져나간다. 남은 청년은 “여기서도 성장할 수 있을까”를 묻지만, 사회가 보여주는 장면이 ‘설명 없는 거액’이라면 답은 쉽게 부정으로 기운다. 공정이 흔들리면 선택지는 단순해진다. 떠나거나, 포기하거나. 그리고 그 포기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구조의 메시지로 결정된다.청년은 거창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청년이 원하는 건 특별대우가 아니다. 같은 규칙, 같은 기준, 같은 설명이다. 큰돈이 문제라기보다 설명 없는 큰돈이 문제다. 상식의 숫자를 깨려면, 상식 이상의 투명성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0억’은 누군가에게는 보상일지 몰라도, 청년에게는 공정이 무너진 사회의 영수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