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건 문화칼럼니스트통영국제음악제는 오랫동안 윤이상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존재해 왔다. 그의 음악은 이 도시의 정체성이자 축제의 존재 이유였으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 없는 구조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진은숙 예술감독의 지난 5년은 단순한 프로그램 운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영이라는 도시가 과거의 기념에서 현재의 실험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일종의 구조 전환 프로젝트였다.그 출발점은 2022년 ‘Vision in Diversity’였다. 팬데믹의 잔해 속에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사실상 해체에 가까운 상태였고, 축제의 기반 역시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때 선택된 전략은 ‘정상화’가 아니라 ‘재설계’였다. 완성된 시스템을 복원하는 대신, 다양성이라는 개념 아래 축제를 하나의 ‘과정’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이는 결과 중심의 축제에서 생성 중심의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이 전략은 일정 부분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국제 네트워크의 복원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세계 현대음악의 핵심 앙상블들이 통영에 집결했고,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단순한 초청을 넘어 축제 구조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레지던스 아티스트의 ‘친구’ 프로그램은 관객 기반을 확장시키며 매표율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통영은 더 이상 특정 작곡가를 기념하는 장소가 아니라, 동시대 음악이 생산되고 교차하는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점에서 진은숙의 5년은 분명한 성취를 남겼다.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비평적 균열도 시작된다. 이 변화는 확장인가, 아니면 치환인가. 윤이상의 음악은 여전히 프로그램에 포함되지만 점차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하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여전히 연주되지만 더 이상 축제를 조직하는 원리로 기능하지 않는다. 국제적 감각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으나, 통영이라는 도시의 역사성과 지역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특히 잘 연주되지 않던 후기 작품들이 새롭게 조명되며 ‘제3의 윤이상’을 드러낼 가능성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지점이다. 축제가 세계를 향해 열릴수록,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잃어버릴 위험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프로그래밍 전략 역시 이중적이다. 브람스와 말러 같은 전통 레퍼토리와 현대음악을 병치하는 방식은 관객 유입에 효과적이었다. 익숙한 음악을 통해 낯선 음악으로 감각을 이동시키는 이 전략은 분명 세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병치가 항상 설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통합이 아니라 타협처럼 보인다. 클래식 레퍼토리는 여전히 티켓 파워를 담당하고, 현대음악은 의미와 명분을 담당하는 이중 구조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통영국제음악제는 여전히 질문 앞에 서 있다. 과연 이 축제는 현대음악의 도시인가, 아니면 클래식 축제의 외피 속에서 실험을 병행하는 과도기적 형태인가.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운드의 층위에서 드러난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자체 제작’이라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반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다. 그러나 지난 5년 동안 이 오케스트라가 고유의 음향적 정체성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외부 오케스트라와 연주자들을 결합해 대형 편성을 구성하는 방식은 기능적 보완에는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 해결에 머문다.오케스트라의 소리는 단순히 연주자의 기량을 합산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색의 일관성, 프레이징의 습속, 리듬에 대한 집단적 감각, 그리고 장기간 축적된 합주의 기억이 쌓일 때 비로소 하나의 사운드가 형성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연주 관습을 지닌 단체들을 단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는 이러한 축적이 불가능하다. 결국 지금의 방식은 ‘국제성의 연출’에는 성공할 수 있어도, ‘자기 사운드의 형성’에는 도달하기 어렵다.최근 몇 년간 ‘Journey Inwards’, ‘Face the Depth’로 이어지는 흐름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외연의 확장보다 내면의 심화로 방향을 전환하고, 프로그램의 밀도를 높이며, 레지던스를 ‘체류’의 개념으로 확장하는 시도는 분명 의미 있다.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브람스와 현대음악을 하나의 구조 안에서 충돌시키는 방식은 단순한 병치를 넘어 음악사적 층위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는 기획자의 차원을 넘어 작곡가로서의 예술감독이기에 가능한 접근이다.그러나 여기서도 다시 윤이상의 문제가 남는다. 그의 음악은 더 이상 기념비적 장식이나 상징적 배치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프로그램의 일부로 분산되는 방식으로는, 통영이 왜 윤이상의 도시인지에 대한 설득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의 작품은 상주작곡가의 레퍼토리처럼 지속적으로 연주되고, 반복적으로 해석되며, 동시대적 감각 속에서 재맥락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구성에 관한 문제다.결국 진은숙의 5년은 하나의 완결된 성과라기보다 구조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 가깝다. 통영은 분명 과거를 기념하는 도시에서 현재를 실험하는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아직 ‘도시의 언어’로 정착하지 않았다. 국제성과 지역성, 현대성과 역사성, 실험과 정체성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확장이나 프로그램의 고도화가 아니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스스로의 몸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바로 그 문제다.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윤이상 음악의 재위치화, 그리고 축제 전체를 관통하는 정체성의 통합. 이 세 가지가 해결되지 않는 한, 통영의 변화는 여전히 ‘과정’으로 남을 것이다.진은숙의 5년은 답을 완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남겼다. 이제 통영국제음악제는 더 이상 질문을 미룰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이다.